해외의료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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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인도 의료선교
인도 의료선교 여행기 2월8일 아침 서울을 출발하여 싱가폴을 경유한 후 심야에 붐바이에 도착하였다. 마중나온 마누 맥완 목사님 일가족의 환영을 받고 공항근처 methodist center 호텔에서 1박하였다. 말이 호텔이지 시설은 상당히 열악하였고 건물역시 노후되어 있었으며 수동식 엘리베이터, 적응하기 어려운 화장실문화, 수많은 모기떼의 습격등은 처음 인도땅을 밟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낮설고 황당함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다음날 아침 국내선비행기로 갈아타고 목적지로 향하였다. 온갖동물과 사람, 우마차, 각종자동차등이 엉겨붙어 다니고 소음과 매연, 공해등 길거리는 말그대로 혼돈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나 그 가운데서도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는 것 같았다. 운전자가 스스로 길을 만들면서 주행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 내려야 하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어쩌다 신호대기에 차량이 서면 어디선가 쏜살같이 나타나서 손을 벌리는 굶주린 어린이들의 모습은 마치 전쟁후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의 시계를 40년전으로 돌려 놓기에 충분하였다. 9박 10일간에 걸쳐 10명의 진료팀과 20명의 선교봉사팀으로 구성된 인도의료선교팀은 작년에 지진피해를 입었던 인도의 북서부 구자르트주의 잠나가지역을 방문하고 진료와 복음을 전하는등 의료선교를 하였다. 출발하기전 글로벌케어로부터 의약품 지원을 받았고 미리 말라리아와 장티푸스 예방약을 먹는등 충분히 사전 준비를 하고 출발하였다. 구자르트주는 북쪽으로 영토분쟁을 하고있는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붐바이공항에서 출발하는 여행객의 검문 검색이 무척 까다로와 무장군인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짐과 몸수색을 당했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국민이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나라로서 기독교문화나 크리스챤에 대하여 상당히 배타적이어서 작년 2월 지진났을 때도 기독교의 이름으로는 도움받는 것을 고사하였다고 하여 이번에 여행목적을 단지 관광으로 하여 입국할 수있었다. 인도의 면적은 우리나라 남북한 합한 크기의 약 15배나 되고 인구는 10억명이 넘는 대국이고 천연자원 또한 풍부한 나라이지만 전국민의 70%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개발도상국가이다. 넓은 땅에 인종이 다양하고 14개이상의 언어를 구사하고 또한 태어나면서 신분에 억매이게되는 카스트제도는 인도의 발전을 막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이 든다. 또한 전인구의 83%가 힌두교를 믿고 각종 동물을 우상화하는 것 역시 인도의 발전에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되며 기독교인구는 전체국민의 약3%미만으로서 힌두교도나 인구의 11%정도 차지하는 이슬람교도로부터 상당히 냉대와 핍박을 받고 지내오고 있음을 목격하였다. 이번 의료선교봉사지역으로 방문한 구자르트주는 인도의 북서에 위치하고 북으로는 파키스탄과 접하고 있으며 면적이 남한보다 크고 인구는 800만명 정도로 추정 된다고 한다. 이번에 방문한 잠나가시는 인구 150만명 정도의 지방 중소도시로서 그지역 주민의 생활상은 우리나라의 30년전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강국이면서도 국민소득(GNP)은 평균 450달러로 전세계적으로도 빈국에 해당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1998년 구자르트주에서 45개의 교회가 정부의 방관하에 주민들에 의하여 전소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후 구자르트주 마우나지역에서 끔직한 지진이 일어나서 도시가 거의 파괴 되는 대재앙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폐허가된 그지역을 다시 재건하는데 소요경비를 북부구자르트 지역의 교회에서 모금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그 크신은혜에 감동 감탄을 금할 수없었다. 진료는 오전 오후로 나누어 나흘간 6곳을 이동하면서 강행하였고 진료지역은 지진난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포함하여 현지교회의 라비 목사가 지정하여 주는 곳을 이동하면서 진료하였다. 숙소로부터 2~3시간 떨어진 지역으로 교통편이나 도로여건이 익숙하지 않은 우리 진료팀으로는 상당한 고역 이었으나 라비 목사를 따르는 크리스챤이 있는 곳에서 우리 진료팀은 열심히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동네가 힌두교도가 많이 모여 사는 지역에는 비교적 우리일행에게 대접도 잘하려고 하고 우호적이었으나 이슬람교도가 많은 실라야 디추다지역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할때는 주민들이 경계심을 풀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있었다. 진료를 마치고 난후 우리팀은 잠나가 지역에서 사막을 가로질러 약 600km 떨어진 내륙 아메가바드시로 이동하였다. 8시간의 차량 여행 끝에 100년전 미국인 선교사가 직접 지었다는 심슨선교 쎈터에 도착하여 인도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우리팀 도착에 맞추어 구자르트주 전지역에서 목회활동하시는 약 150여명의 목사님들이 비록 종파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 세미나를 하고 있었으며 우리진료선교팀의 도착을 매우 환영하여 주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로부터 억눌려 한없이 쳐져 있었고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우리선교팀의 방문을 받고 현지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 목사님들은 정말 가뭄의 단비를 만난듣 너무 좋아하였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정을 느낄 수있었다.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피부, 언어, 생활풍습, 환경등 모든 것이 다르더라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감동의 시간을 가졌다. 한경민 2007.03.19
인도 의료선교 여행기 2월8일 아침 서울을 출발하여 싱가폴을 경유한 후 심야에 붐바이에 도착하였다. 마중나온 마누 맥완 목사님 일가족의 환영을 받고 공항근처 methodist center 호텔에서 1박하였다. 말이 호텔이지 시설은 상당히 열악하였고 건물역시 노후되어 있었으며 수동식 엘리베이터, 적응하기 어려운 화장실문화, 수많은 모기떼의 습격등은 처음 인도땅을 밟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낮설고 황당함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다음날 아침 국내선비행기로 갈아타고 목적지로 향하였다. 온갖동물과 사람, 우마차, 각종자동차등이 엉겨붙어 다니고 소음과 매연, 공해등 길거리는 말그대로 혼돈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나 그 가운데서도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는 것 같았다. 운전자가 스스로 길을 만들면서 주행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 내려야 하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어쩌다 신호대기에 차량이 서면 어디선가 쏜살같이 나타나서 손을 벌리는 굶주린 어린이들의 모습은 마치 전쟁후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의 시계를 40년전으로 돌려 놓기에 충분하였다. 9박 10일간에 걸쳐 10명의 진료팀과 20명의 선교봉사팀으로 구성된 인도의료선교팀은 작년에 지진피해를 입었던 인도의 북서부 구자르트주의 잠나가지역을 방문하고 진료와 복음을 전하는등 의료선교를 하였다. 출발하기전 글로벌케어로부터 의약품 지원을 받았고 미리 말라리아와 장티푸스 예방약을 먹는등 충분히 사전 준비를 하고 출발하였다. 구자르트주는 북쪽으로 영토분쟁을 하고있는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붐바이공항에서 출발하는 여행객의 검문 검색이 무척 까다로와 무장군인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짐과 몸수색을 당했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국민이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나라로서 기독교문화나 크리스챤에 대하여 상당히 배타적이어서 작년 2월 지진났을 때도 기독교의 이름으로는 도움받는 것을 고사하였다고 하여 이번에 여행목적을 단지 관광으로 하여 입국할 수있었다. 인도의 면적은 우리나라 남북한 합한 크기의 약 15배나 되고 인구는 10억명이 넘는 대국이고 천연자원 또한 풍부한 나라이지만 전국민의 70%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개발도상국가이다. 넓은 땅에 인종이 다양하고 14개이상의 언어를 구사하고 또한 태어나면서 신분에 억매이게되는 카스트제도는 인도의 발전을 막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이 든다. 또한 전인구의 83%가 힌두교를 믿고 각종 동물을 우상화하는 것 역시 인도의 발전에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되며 기독교인구는 전체국민의 약3%미만으로서 힌두교도나 인구의 11%정도 차지하는 이슬람교도로부터 상당히 냉대와 핍박을 받고 지내오고 있음을 목격하였다. 이번 의료선교봉사지역으로 방문한 구자르트주는 인도의 북서에 위치하고 북으로는 파키스탄과 접하고 있으며 면적이 남한보다 크고 인구는 800만명 정도로 추정 된다고 한다. 이번에 방문한 잠나가시는 인구 150만명 정도의 지방 중소도시로서 그지역 주민의 생활상은 우리나라의 30년전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강국이면서도 국민소득(GNP)은 평균 450달러로 전세계적으로도 빈국에 해당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1998년 구자르트주에서 45개의 교회가 정부의 방관하에 주민들에 의하여 전소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후 구자르트주 마우나지역에서 끔직한 지진이 일어나서 도시가 거의 파괴 되는 대재앙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폐허가된 그지역을 다시 재건하는데 소요경비를 북부구자르트 지역의 교회에서 모금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그 크신은혜에 감동 감탄을 금할 수없었다. 진료는 오전 오후로 나누어 나흘간 6곳을 이동하면서 강행하였고 진료지역은 지진난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포함하여 현지교회의 라비 목사가 지정하여 주는 곳을 이동하면서 진료하였다. 숙소로부터 2~3시간 떨어진 지역으로 교통편이나 도로여건이 익숙하지 않은 우리 진료팀으로는 상당한 고역 이었으나 라비 목사를 따르는 크리스챤이 있는 곳에서 우리 진료팀은 열심히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동네가 힌두교도가 많이 모여 사는 지역에는 비교적 우리일행에게 대접도 잘하려고 하고 우호적이었으나 이슬람교도가 많은 실라야 디추다지역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할때는 주민들이 경계심을 풀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있었다. 진료를 마치고 난후 우리팀은 잠나가 지역에서 사막을 가로질러 약 600km 떨어진 내륙 아메가바드시로 이동하였다. 8시간의 차량 여행 끝에 100년전 미국인 선교사가 직접 지었다는 심슨선교 쎈터에 도착하여 인도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우리팀 도착에 맞추어 구자르트주 전지역에서 목회활동하시는 약 150여명의 목사님들이 비록 종파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 세미나를 하고 있었으며 우리진료선교팀의 도착을 매우 환영하여 주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로부터 억눌려 한없이 쳐져 있었고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우리선교팀의 방문을 받고 현지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 목사님들은 정말 가뭄의 단비를 만난듣 너무 좋아하였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정을 느낄 수있었다.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피부, 언어, 생활풍습, 환경등 모든 것이 다르더라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감동의 시간을 가졌다. 한경민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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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의료 선교 여행기
최초의 한중합작병원 "연변대학 복지병원 방문기" 한경민 / 2000-09-15 / 168 / 최초의 한중 합작병원 "연변대학 복지병원" 방문기 8월 18일 오전 간간이 비가 뿌리며 잔뜩찌푸린 서울의 날씨는 정부의 준비안된 의약분업 강공 드라이브 정책에 대한 의사들의 억눌린 마음을 대변 하는 듯 착잡한 심정으로 우리팀 일행은 중국북방항공소속 비행기에 몸을 싣고 약 3시간의 비행후 심양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인 연길시에 도착하였다. 연길시는 북한의 함경북도와 직선거리로 불과 40~50km 떨어진 소도시로서 사방에 고층건물공사가 한창 진행중이고 시민들이 바삐 움직이는 발전하는 도시의 보습을 보여 주었다. 연변자치주의 인구는 약 35만명이며 이중 약 60%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이곳에 약 100병상 규모의 한중 합작병원이 3년전에 설립되어 지금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음을 보았다. 병원 명칭은 연변대학복지병원으로 병원과 연변대학이 서로 붙어 있었지만 연변대학은 의과대학이 없으므로 부속병원은 아니고 다만 자매병원 수준이라고 한다. 병원규모는 우리나라 지방어느 중소도시의 의료원을 연상시키지만 이곳에서 그동안 92건의 개심술을 시행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2달에 한번씩 방문하는 서울대학병원의 흉부외과팀의 도움을 받고 수술을 한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사망률이 제로라는 이야기는 또한번 놀라기에 충분한 뉴스거리였다. 중국의 중앙부처에서도 이러한 소도시 소규모병원에서 개심술을 시행하는 것에 대하여 이미 소식을 듣고 알고 있다고 하며 아마 100병상규모의 소병원에서 개심술을 시행하는 것은 전세계에 유래가 없을 것으로서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복지병원의료진중 한국인으로는 내과, 외과, 흉부외과, 이비인후과의사 그리고 이사장, 간호과장을 비롯하여 몇분의 직원이 근무하고 계셨는데 모두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운 조건에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없으면 근무하기 어려운 이역땅에서의 생활을 몸소 실천 하는 것을 보고는 절로 고개가 수그러 짐을 느꼈다. 다른과의 영역은 잘모르고 방사선과를 두루 살펴보았는데 X-ray장비는 한국제품으로 아시아X-ray회사에서 만든 500MA 투시촬영기 1대가 설치 되어 있고 초음파는 메디슨제품 sonoace 4300을 기증받아 복부질환의 진단에 이용되고 있으며 최신 acuson color doppler 1 대가 설치되어 주로 심장 초음파검사에 이용되고 있었을뿐 CT나 MRI, Angiography등 첨단 고가의 의료장비는 아직 설치 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의 의료제도상 아직 전문의 과정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첨단의 고가의료장비가 아직 사용하기에 이르지 않나 하는 느낌도 받았다. 필자가 방문한 그병원에는 초음파를 하는 여자기사가 한분 있었고 방사선촬영실에는 한국에서 온 방사선기사한분과 조선족 방사선과의사 두명이 같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특수투시 촬영이나 판독등이 아직 우리와 비교시 미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위장 조영술시행시 분말의 바리움을 믹서기도 없이 손으로 물에섞서 반죽하여 조영제로 이용한다든가 촬영하는 기법등은 아직 서투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사선과촬영실에 단지 투시촬영기 1대 밖에없는데 의사가 2명이 근무 하고 있고 초음파는 여자기사가 독자적으로 시행하고 판독하는 것이 우리와 다른 사회주의 체제하에서의 의료제도의 한 면이라고 생각했다. 발전속도로보아서 조만간에 우리와 비슷한 의료장비를 갖추고 각종 영상진단법을 연수 받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검사의 수가는 우리와 비교시 매우 싸서 복부초음파나 위장투시검사 비용이 대략 40~50위엔 (우리돈 5~6천원)정도 였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오랜세월 한의학에 의지해 왔기 때문에 서양식 병원에서도 한약에 의한 치료 투약이 동시에 이루어 지고 있어서 투약실이 양약과 한약 두군데가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또 한가지 특이한것으로는 접수구에 각종검사의 수가가 마치 증권회사의 주식가격처럼 적혀 있음을 보았다. 이번 방문을 통하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병원운영, 관리시스템의 일부분을 볼수 있었으며 앞으로 또다시 방문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곳에서 일하고 계신분께 좀더 최신 의학기술 정보등을 제공하여 연변에 살고 있는 우리동포들에게 좀더나은 의료 서비스가 제공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경민 2007.03.19
최초의 한중합작병원 "연변대학 복지병원 방문기" 한경민 / 2000-09-15 / 168 / 최초의 한중 합작병원 "연변대학 복지병원" 방문기 8월 18일 오전 간간이 비가 뿌리며 잔뜩찌푸린 서울의 날씨는 정부의 준비안된 의약분업 강공 드라이브 정책에 대한 의사들의 억눌린 마음을 대변 하는 듯 착잡한 심정으로 우리팀 일행은 중국북방항공소속 비행기에 몸을 싣고 약 3시간의 비행후 심양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인 연길시에 도착하였다. 연길시는 북한의 함경북도와 직선거리로 불과 40~50km 떨어진 소도시로서 사방에 고층건물공사가 한창 진행중이고 시민들이 바삐 움직이는 발전하는 도시의 보습을 보여 주었다. 연변자치주의 인구는 약 35만명이며 이중 약 60%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이곳에 약 100병상 규모의 한중 합작병원이 3년전에 설립되어 지금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음을 보았다. 병원 명칭은 연변대학복지병원으로 병원과 연변대학이 서로 붙어 있었지만 연변대학은 의과대학이 없으므로 부속병원은 아니고 다만 자매병원 수준이라고 한다. 병원규모는 우리나라 지방어느 중소도시의 의료원을 연상시키지만 이곳에서 그동안 92건의 개심술을 시행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2달에 한번씩 방문하는 서울대학병원의 흉부외과팀의 도움을 받고 수술을 한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사망률이 제로라는 이야기는 또한번 놀라기에 충분한 뉴스거리였다. 중국의 중앙부처에서도 이러한 소도시 소규모병원에서 개심술을 시행하는 것에 대하여 이미 소식을 듣고 알고 있다고 하며 아마 100병상규모의 소병원에서 개심술을 시행하는 것은 전세계에 유래가 없을 것으로서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복지병원의료진중 한국인으로는 내과, 외과, 흉부외과, 이비인후과의사 그리고 이사장, 간호과장을 비롯하여 몇분의 직원이 근무하고 계셨는데 모두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운 조건에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없으면 근무하기 어려운 이역땅에서의 생활을 몸소 실천 하는 것을 보고는 절로 고개가 수그러 짐을 느꼈다. 다른과의 영역은 잘모르고 방사선과를 두루 살펴보았는데 X-ray장비는 한국제품으로 아시아X-ray회사에서 만든 500MA 투시촬영기 1대가 설치 되어 있고 초음파는 메디슨제품 sonoace 4300을 기증받아 복부질환의 진단에 이용되고 있으며 최신 acuson color doppler 1 대가 설치되어 주로 심장 초음파검사에 이용되고 있었을뿐 CT나 MRI, Angiography등 첨단 고가의 의료장비는 아직 설치 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의 의료제도상 아직 전문의 과정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첨단의 고가의료장비가 아직 사용하기에 이르지 않나 하는 느낌도 받았다. 필자가 방문한 그병원에는 초음파를 하는 여자기사가 한분 있었고 방사선촬영실에는 한국에서 온 방사선기사한분과 조선족 방사선과의사 두명이 같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특수투시 촬영이나 판독등이 아직 우리와 비교시 미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위장 조영술시행시 분말의 바리움을 믹서기도 없이 손으로 물에섞서 반죽하여 조영제로 이용한다든가 촬영하는 기법등은 아직 서투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사선과촬영실에 단지 투시촬영기 1대 밖에없는데 의사가 2명이 근무 하고 있고 초음파는 여자기사가 독자적으로 시행하고 판독하는 것이 우리와 다른 사회주의 체제하에서의 의료제도의 한 면이라고 생각했다. 발전속도로보아서 조만간에 우리와 비슷한 의료장비를 갖추고 각종 영상진단법을 연수 받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검사의 수가는 우리와 비교시 매우 싸서 복부초음파나 위장투시검사 비용이 대략 40~50위엔 (우리돈 5~6천원)정도 였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오랜세월 한의학에 의지해 왔기 때문에 서양식 병원에서도 한약에 의한 치료 투약이 동시에 이루어 지고 있어서 투약실이 양약과 한약 두군데가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또 한가지 특이한것으로는 접수구에 각종검사의 수가가 마치 증권회사의 주식가격처럼 적혀 있음을 보았다. 이번 방문을 통하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병원운영, 관리시스템의 일부분을 볼수 있었으며 앞으로 또다시 방문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곳에서 일하고 계신분께 좀더 최신 의학기술 정보등을 제공하여 연변에 살고 있는 우리동포들에게 좀더나은 의료 서비스가 제공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경민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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